내면의 탐색을 생략했을 때 해석의 여유와 자유를 줌과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들추기 싫은 자신의 내면을 만나게 만드는 날카로움이 함께 있었습니다. 최윤의 몇 작품들은 그래서 좋았습니다.
이어서 김애란의 작품들을 읽는데 책을 읽고 자란 세대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읽다 보면 편집작가의 가위질이나 감독의 컷 사인이 들리는 듯한 그런 글을 구사하더군요. 아울러 단어를 구슬리고 희롱하는 유희를 능수능란하고 천연덕스레 벌입니다. 소설이라는 쇼 무대에서 MC를 맡아 좌중의 시선을 포로로 삼아버리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사진의 맨 위 책부터 연대 순으로 읽는 중입니다. 도도한 인생이나 침이 고인다 같은 작품에서 청각과 미각을 동원해서 문학적 관능을 자극합니다. 목수가 목재의 모양과 재질을 살피듯 단어를 툭툭 쳐보거나 쓰다듬어 보는 모습이고 그 시도는 독특하고 성공적입니다. 때로 소소한 에피소드임에도 의식하지 않은 사이 거대 담론을 응시하는 듯도 보입니다. 언어의 탐구자로서 본질로 들어가면 갈수록 같은 진실에 도달하기 때문일까요?
'침이 고인다'는 분명 개인 간의 관계와 회사 내 관계 속에서 첫 인상과 익숙해진 뒤의 느낌과 처음의 그것과 다르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과정을 병치한 이야기인데 그것이 관계의 뒤끝이 신물 난다는, sour한 느낌은 영어권 문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흔한 표현을 인삼껌으로 교체하는 마법에 가까운 대수술을 감행한 결과 독자는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다가갈 때 결말을 예상하면서, 딸려오는 인삼껌을 상기하고 따라서, 입 안에 침이 고이게 됩니다. 의자가 흔들리는 4DX시스템 극장을 활자로 체험하는 격입니다.
'침이 고인다'가 후배를 집에 들이고 살다가 쫓아내는 과정을 기술하며 인간관계 최소단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 했다면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Wasted Lives)'에서는 21세기에 벌어지는 일들을 새로운 각도로 관찰하고 본래의 목적과 의무를 방기한 국가나 체제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보호를 받아 마땅한 삶들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기치 아래 재생의 가치조차 없이 버려지는 대상으로 전락한 이유를 풀어냅니다.
바우만은 복지의 대명사로 알려진 스웨덴이 쓰레기 국가임을 타당하게 변증해 내고, 9.11이후 난민들을 불쌍한 구호의 대상에서 위험한 테러리스트로 착색하며 시스템 차원에서 조장하는 사회불안의 재료로 활용한 영국 기레기와 정치권에 (속고 녹아들어가) 부응한 영국 국민들의 선택이 결국 Brexit(2016)으로 이어졌다는 아이러니를 그 원인과 과정과 반사이익을 얻는 집단이 어디에 있는지 외국이든 국내이든 읽다 보면 연상할 수 있게 통찰 어린 문장에 감정 어린 형용사를 얹어 당연히 누려야 할 인간적 행복을 바라보는 공통선의 시각을 견지하며 그렇지 못한 현상들을 고발합니다.
21세기 정치경제사회적 최신 유행, 바우만의 축약개념인 '유동성'은 여러 겹 장막 뒤의 범인을 독자들이 찾아 나서게끔 만드는 환기성 개념이지 고착된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지적 허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바우만이 그러는데 21세기는 액체라며~~ 이러면 곤란하단 말입니다.
김애란과 바우만은 각기 자신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기록했지만 솔직하게 써 내려간 김애란의 개인사와 복잡한 현대사의 궤적에서 진실을 파헤친 바우만의 통찰은 어떤 기준으로는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나은 개인, 좀 더 나은 세상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바우만은 카프카와 크라카우어를 자주 인용했습니다. 카프카는 여기서 더 말할 필요가 없고 크라카우어는 바우만으로부터 소개받은 기분이라 진중하게 접근할까 합니다. 발터 벤야민과 같이 일 했었고 사진이나 영화이론에 대한 책을 썼으며 아도르노의 멘토였다는 크라카우어, 바우만이 인용한 크라카우어의 말들이 바우만의 해석에 힘 입은 바 있어서 달리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카프카도 마찬가지니까요.
크라카우어의 다음 표현(1930년)은 OTT와 아이돌이 장악한 요즘 세태(2024년)를 말하는 것 같은데 문장 말미에 나찌가 등장합니다^^. 미국도 독일도 신나찌가 있다지요. 우리는요?(수사적 표현이지 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닙니다)
Spiritually homeless, and divorced from custom and tradition, these employees sought refuge in the new "distraction industries" of entertainment. Observers note that many of these lower-middle class employees were quick to adopt Nazism, three years later. (The Salaried Masses By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정신적으로 집이 없고 관습과 전통에서 멀어진 이 직원들은 새로운 '주의 산만 산업'인 엔터테인먼트에서 피난처를 찾았습니다. 관찰자들은 이러한 중산층 이하의 직원들 중 상당수가 3년 후 나치즘을 빠르게 받아들였다고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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