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을 읽을 때가 생각납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고 있는 눈앞에 닥친 현실에 임장해 있는 것, 타의에 의존해 기대할 수 있는 것과 벌어질 일들이 격차가 너무 커서 상황을 개선할 여지가 없으며 탈출할 도리가 없다는 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로 내가 규정되고 평판이 성립된다는 것, 급기야 폭력의 대상이 된다는 것 정도로 짧지만, 강력한 뒷맛을 남긴 작품이었습니다.
심판을 읽을 때가 생각납니다.
변신은 신체적 변화로 인해 사회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주변인이나 주어진 일들과 나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지금 발휘할 수 있는 자기 능력에 따라 평가가 달라짐을 알 수 있었다면
심판에서는 주어진 역경이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관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듯하다고 수긍하기 쉬운데 심판에 대해 변신을 읽으면서 터득했다고 착각한 독법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역시 미로에 빠지고 맙니다. 변신에서 몸이 달라진 것에 대한 반응과 그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말고는 나름대로 생각의 궤가 일상적 범위 내이기 때문에 풍자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카프카 생전에 출판이 됐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변신을 읽으면서 터득했다고 생각한 카프카 독법으로 심판을 읽고 나니 성취감보다는 패배감이 앞섰습니다. 이게 뭐야 이게 뭐지?
성을 1년을 넘겨 읽었습니다.
변신의 결론이 달리 보입니다. 아버지는 자본주고 변신한 아들은 노동자이며 사과에 맞아 죽는 것은 해고입니다. 21세기 현재의 제 해석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심판은 미완성이었으므로 결말 이전에 카프카가 고심했을 어떤 부분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카프카가 완성하지 못했던 그 부분 때문에 독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부조리에 당혹합니다. 읽은 자신을 탓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자책하지 않습니다^^
변신은 생전에 출판된 작품이지만 심판과 성은 카프카 사후에 출판됐습니다. 카프카는 자신의 원고를 모두 태우라고 친구에게 부탁했었죠.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카프카 또한 100년 전 사람이기에 미래의 평가를 그 시기에 스스로 내렸을 리가 만무합니다. 스스로 앞서갔다고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다만, 변신에서처럼 전통적 소설적 구성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고 완성했던 작품과 달리 심판이나 성은 완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출판에 회의적이었을 것입니다. 요즘 말로 자신이 던진 떡밥들, 구조적으로 흩어진 떡밥들을 주워 담을 구체적인 형상화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그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거나로 출판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게시판 글을 써도 결론이 있어야 하는데 완성하지 못한 원고를 출판해 달라고 할 작가가 있을까요, 태우라고 하는 '태도'가 맞지요.
심판만 해도 읽기 힘들었는데 성을 일반적인 생각으로 읽어나가려면 독자가 감당해야 할 과부하가 크리라는 것을 카프카는 미리 알았을 것입니다. 태우라고 한 이유가 그런 과부하를 상쇄시킬 작품적 완성이나 이론적 해명이 불가능해서 아니었을까, 현대적 의미의 해석을 예상하고 후일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을 내다봤다면 태우라고 했을까요.
심판을 읽을 때는 변신은 알겠는데 심판은 모르겠네, 성을 읽을 때는 심판은 알겠는데 이건 뭐지 이게 뭐야? 2였지만 성의 후반부에 이르면서 변신과 심판을 읽는 사람의 처지가 아닌 쓰는 사람의 눈으로 보니 변신/심판/성을 쓰고 있는 카프카의 모습이 상상되었습니다.
신문 펴 놓고 정치, 사회, 문화, 경제(심지어 연재소설까지) 등 각 분야의 기사를 고른 다음 기사들에서 한 문장씩 갹출해서 주어만 일관되게 바꾼다면, 나아가 목적어와 형용사 또한 무작위로 배치를 바꾼다면, 그래서 각 기사의 기조들이 다른 기사의 기조로 이동하는 모습처럼 소설 속에서 상황이 전개되게 만든다면 아마 카프카 적 소설을 금방 쓸 수 있을 겁니다. 성에 이르러 이런 글쓰기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요즘엔 챗지피티에 시키면 계산력 자원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 초, 분 이내로 생성할 것입니다. 심판과 성을 챕터 별로 셔플링한 다음 주어와 상황을 연계시킨다면 괴작이 나올 수도 있겠죠.
인공지능에 시키면 금방 생성시킬 그런 작품이 가치 있을까요? 그래봤자 카프카 작품을 결코 흉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망가진 시계는 하루에 두 번 정확하게 맞는다는 말이 있죠. 카프카의 성을 읽다 보면 어떤 한 문장, 혹은 일련의 몇 문장이 세태를 반영한 정확하고 예리한 비판임에도 생뚱맞은 위치에서 나오기에 그 비판의 책임으로부터 작가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부터 줄거리를 잊고 문장들을 따로 떼어 읽었습니다. 대화를 대화로 읽지 않고 작품 자체를 문장의 모음집이라 생각하고 읽어나가니 오히려 재미가 생겼습니다. 문장 하나에 숨어있고 전제가 됐을 배경, 전제, 의도 등이 끝도 없이 꾸물꾸물 드러납니다. 마법사의 호주머니에서 끝없이 나오는 손수건처럼요.
변신이 줄거리가 요약될 만큼 주제 의식이 강하게 드러나지만, 심판은 변신과 성의 중간 정도의 위치에서 제목에서 유출됐듯 결과가 있어야 하는 방향성이 있는 작품입니다.
심판보다 한층 모호성이 강화된 성은 요약하지 말고 결과를 예상하지 않으며 문장들을 주의 깊게 읽는 작품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도입부에는 성으로 가야 하는 목적이 있었지만, 목적은 변하는 상황에 따라 - 독자가 램 메모리에 띄운 암암리 예상을 벗어나면서 - 방향성이 사라집니다.
목적 없이 부조리로 가득한 사회상, 인생사 이런 모습이 오히려 현대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들 아닐까 합니다. 오늘도 뉴스의 머리기사들은 카프카의 문장들과 닮았습니다. 개개의 목적은 분명하지만, 전체의 목적은 인과율과 도덕률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카프카는 100년 전에 느꼈을까요?
혼자 문장을 만들고 재배치하며 대화의 관계 설정을 벗어나는, 인과관계를 틀어지게 만들어 새로운 관계를 전개하기 위한 단어 몇 개를 고춧가루처럼 뿌리면서 혼자 좋아했을 카프카가 보입니다. 즐거운 작업 결과물이긴 하지만 어쩌면 결과를 배설한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태우라고 했겠죠.
이언 매큐언의 바퀴벌레가 카프카의 변신에서 모티프를 따왔다고 하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은 정작 카프카 적 가치는 그런 시도가 100년 전에 나왔다는 것이고 브렉싯이 희화화기에는 너무 심각한 내용이면서 비판이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죠. 비판이 유희로 인식될 때 상품화될 여지가 생기며 본래 비판의 목적은 카프카처럼 휘발됩니다. 카프카 이후에 많은 작품에 끼친 영향이 아이러니하게 상품적 가치를 극대화하는데 많이 쓰이게 됐지 않았나요?
이언 매큐언은 집필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했는데 동시에 배설의 결과물일지도 모를 원고를 발표했다는 점이 친구에게 원고를 태워달라고 부탁한 카프카의 생각과는 좀 다른 점입니다. 심판이나 성과 달리 변신은 생전출판물이기에 살짝 정면 비교가 아닌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변신/심판/성은 카프카의 작품이면서 '작가를 지우려는 작가의 개입이 심화하는 추이'를 보이기에 각각의 독특한 작품들입니다. 이건 카프카야 하고 읽으면 낭패를 겪기 쉬우니 변신은 변신으로 심판은 심판으로 성은 성으로 예의를 갖춰 읽을 그런 작품들입니다.
현대인들이 카프카를 읽기 싫어도 현실에서 카프카를 겪고 있고 카프카 작품 속의 인물들이 자신들의 목표가 분명해 보이지만 뙤약볕 내리쬐고 있는 앞마당에 담장 그늘을 따라 부산히 움직이고 있는 개미들의 모습처럼 눈앞에 보이는 게 목표가 되어버리는 모습이 21세기 삶의 단면과 닮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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