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에 대한 연구결과 발표 임박"이라고 굵은 폰트로 쓰인 썸네일에 혹해서 잠시 봤는데 굵은 폰트와 썸네일 속의 자극적인 단어가 낚시에 역시 효과적이구나 라는 생각만 남았습니다.
동영상에서 나온 두 학자(David Chalmers, Christof Koch)가 나온 최근 기사를 찾았습니다.
두 학자 각각 정보가 많지만 집중과 선택, 지금은 '특정 연구결과'만 알아봅니다.
관련 기사
(뉴욕타임스 230701)
https://www.nytimes.com/2023/07/01/science/consciousness-theories.html?smid=nytcore-android-share
위 기사와 거의 같은 내용이 한겨레에 실려 있습니다.
(한겨레 230719)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1100779.html
링크 기사 읽기 귀찮은 분을 위해서 짧게 말하자면, 과거의 만남에서 내기 걸었던 25년 내 발견할 것에 대한 예스, 노의 대결에서 노가 이겼고 다시 25년 후를 기약하는데 부정적 의견으로 승리한 데이비드 차머스는 여전히 부정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발견하는 내기에서 발견을 못했느냐?
Conscious experience is associated with the activity of certain neurons essential for the awarness that comes with it.(뉴욕타임스, 의식적인 경험은 그에 따른 인식에 필수적인 특정 뉴런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데) 그것=such a neural marker(뉴욕타임스, 신경표지자)를 발견하는 것에 대한 내기였습니다.
비교: 뇌에서 의식의 특정 신호(한겨레 신문)
몇 번 읽어봤어도 특정 의식적 경험의 표지자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 marker'가 번역에서는 '특정 신호'로 축약되었네요^^
뇌과학자는 2023년 시점 25년 후인 2048년의 성과를 확신했고 철학자는 아직 부정적인데 기사의 내용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여서 논의한 최신 뇌과학 분야의 연구성과를 아는 것입니다.
의식의 원천에 대한 두 이론인 통합정보이론(IIT=Integrated information theory)과 전역 신경 작업공간 이론(GNWT=global neuronal workspace theory)에 대한 한겨레 신문의 설명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용을 읽기 전에, 한겨레 기사와 달리 뉴욕타임스에는 GNWT가 first입니다. 피상적인 지식을 원하면 한겨레만 읽으면 되고 살이 온전히 붙어있는 글을 보려면 뉴욕타임스 문장을 봐야 되네요. 전문적인 지식을 원하면 해당 책들을 봐야겠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연구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은 동료과학자들이 하겠죠( 발표현장에 관심 있는 사람들도 모였다고 하는데, 저는 관심 있는 사람에서 제외입니다^^)
첫째는 통합정보이론(IIT=Integrated information theor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의식이란 이미지를 보는 것과 같은 특정 경험이 발생하는 동안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뇌 부위에서 정보를 통합시키는 신경 연결 메카니즘, 즉 구조다. 이 이론은 의식의 발원지를 감각처리 영역이 집중돼 있는 뇌 뒤쪽, 즉 후측 피질(머리 뒤쪽의 가장 바깥쪽 부위)로 본다.
둘째는 전역 신경 작업공간 이론(GNWT=global neuronal workspace theor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감각기관에서 나온 신호 가운데 전두엽 피질에 도달하는 것만 인식하게 되며, 이 신호가 이곳을 거쳐 모든 뇌 영역으로 마치 방송하듯 전달되면서 의식이 형성된다. 이 이론은 의식의 발원지를 사고력, 주의력, 문제 해결력을 담당하는 뇌 앞쪽, 즉 전두엽 피질로 본다.
왜 한겨레 기사에서 순서가 바뀌었나 했는데 세 가지 실험 중 2부문에서 IIT가 이겼기 때문에 그리 배치한 것 같습니다. 뉴욕타임스 기사에 있는 연구과정에 대한 많은 내용이 한겨레 기사에는 빠졌습니다. 다른 소스에서 취재했거나 꼭 알아야 할 필요 없다고 생략했을 수도 있습니다.
차머스가 지고 코흐가 이겼다 해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시발점 정도에 도착하는 것이죠.
그랬군요 피셜, 아직도 장님들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단계 아닐까 합니다. 두 이론의 승패와 상관없이 전혀 다른 결과가 미래에 나올 수도 있고요.(그러건 말건)
Cogitate Consortium은 계속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사내용과 동일한 동영상도 있네요.(7분)
https://youtu.be/8kYieXmI7oo?si=otBKveh1bP0u8vTu
그래서 왜 이 글을 썼는지 궁금하시면, 계속 읽으셔야 합니다^^
내면소통의 저자로 유명한 김주환 교수가 의식에 대해서 설명합니다.(1시간 50분)
https://www.youtube.com/live/PUc10nTSQlA?si=id0Xj-63Y0TzLtao
의식의 특성들은 자연적이고도 고정적으로 주어진 생물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뇌의 오랜 습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나 자신’을 바꾼다고 할 때의 ‘나’는 의식에 기반을 둔 ‘나’입니다.
즉 ‘나’는 곧 나의 ‘의식’이지요.
따라서 의식이 어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이해해야만 ‘나’를 잘 조절하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적어도 나의 뇌가 나의 의식에 어떤 특이한 환상들을 부여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마음근력 훈련을 통해 내가 스스로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 김주환
참고로 김주환 교수님은 신앙을 가진 종교인이기도 합니다.^^(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식의 원천을 밝히는 연구는 아직 답보상태지만 그간의 성과만으로도 김주환 교수 말씀처럼 스스로의 생각을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뇌과학이 부재했던 시대에 깨달음으로 이어졌던 원효대사의 해골물이나 혜가가 자른 팔 이야기보다 지금의 뇌과학적 성과 위에서 더 많은 사람이 더 객관적인 공통 시각을 견지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과학지식 탑재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평균적 지성이 원효나 혜가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뇌과학과 개인과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몰라도 되고 알아도 별 것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들의 관심, 처한 상황, 원하는 것에 따라 다르겠죠. 이런 것에 대한 예의 표준으로 삼기에는 조 디스펜자 사례는 극단적입니다. 카이로프락터였던 디스펜자가 사고로 사지가 마비됐다가 극복한 내용은 기적이기도 하고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무엇'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무엇이 뇌과학에서 아직 밝혀내지 못한 부분에 가려져 있을 뿐이죠. 디스펜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가설의 살아있는 증거이고요. 뇌과학의 성과를 페니실린 발견 이후 항생제가 위치한 현재 의학의 모습과 비교해서 디스펜자가 개인적인 경험(노력)으로 얻었던 성과를 수술실이나 처방약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10083
디스펜자의 방법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다른 사람에게서도 효과적이라면 뇌과학의 성과를 기다리기 전에 어떤 기적을 개인이 경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다름없습니다. 그래도 매번 기적입니다. 누군가 필요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표준화된 시술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므로 흔히 동의하지 않는 측으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는 '시크릿'과 맥락이 통하기도 합니다.(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의 영역, 혹은 경험적 접근에만 해당되는 영역, 쉽게 말해 느낀 사람만 아는 것.)
뇌과학의 성과나 사지마비에서 회복한 '의지와 명상의 힘' 같은 것들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현재의 뇌과학 연구성과의 위치와 디스펜자가 말하는 영역 사이에 김주환 교수의 명상이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스려 잘 사는 것.(뇌과학이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대략 말해 몸과 마음의 연결^^)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다'의 주체는 '나' 아니겠습니까.
확실한 것들이 있고 불확실한 것들이 동시에 있으며 모두가 환상이라고 하는 말들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에서 정리하지 않으면 '몰라' '무서워'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기 있으라 하면 됩니다.
내가 여기에 지금 있습니다. 내 정신은 내 머릿속에 있고 내 생활은 내 생각과 내 사지의 움직임으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현재를 사는 주체로서 슬기로운 선택은, 나 다운 나를 위한 시간을 오늘 지금 건강하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게 많아 두 시간을 바친 글입니다. 두 시간 전과 지금 달라진 것은 차머스가 내기에 이겨 기사의 사진에서 보듯 와인을 받았고 마셨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코흐는 행사장에 한 박스를 들고 왔고 참석자들이 나눠마셨을 것입니다.
1978년 산 마데이라(Madeira)라는, 게다가, 포르투갈 와인입니다. 병당 400불이 넘는군요. 쩝.
Barbeito Vinhos - Sercial - Frasquei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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