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머리와 닭의 몸, 말대가리만 있는 증기마차 등 기괴한 볼거리가 많은 '가여운 것들'은 무엇이 '가여운' 것일까 찾아가는 감상자세를 취하면서 봤었는데요.
인간 자체가 '신'의 눈으로 볼 때 가엾고 신을 자처하는 인간이나 같은 인간끼리 소유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습들이 가여워 보이려다가(처음에는 그렇게 관조하는 모습으로 감상했다가) 그런 것을 유도하듯 화면이 장면이 바뀔 때 어안렌즈로 촬영한 듯 혹은 만화경을 보듯 주변부가 어둡게 보이길래 제목은 페이크라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관찰하고 있는 듯한 관객을 감독이 인식한다고 알려준다고나 할까요?
감독 혹은 작가는 사디스트인가?라는 의문도 들기 시작했죠.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는 영화가 아니라 이건 상상이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푸는데 그렇다면 왜 이런 상상을 같이 해야만 하는가라는 공범이 되기 싫은 저항마저도 느꼈습니다.
벨라가 육체적 쾌락에 눈을 뜨면서 영화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뀝니다. 구강기를 벗어나자 마자 성에 눈을 뜨지만 억압적인 교육환경에 여성은 길들여지게 되어 있고 약혼에 이르는 동안 유아적인 반항만 하던 벨라는 일탈을 넘어 가출을 선언하고 아빠'신'은 허락하게 되죠. 이야기를 이끌기 위해 비윤리적인 실험적 수술을 자행한 결과로 얻은 벨라에 대해 런던을 가동시킬 전력으로 자극을 해도 성적인 흥분을 일으키기 어려운(짧게 줄여 거세된) 아빠는 넓은 부성애를 발휘해서 비상금까지 넣어주며 허락합니다. - 행위와 주체 간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런 측면으로 볼 때 영화 속에 많이 나오는 키메라들처럼 원작소설 또한 구조적으로 키메라인 것이죠. 괴기와 로맨스와 정치소설이란 혼종인데 한 사람의 캐릭터도 그런 혼종이라고 보고 납득해야 할까요? - 쎈세이션만을 추종한 이야기전개라고 이해했습니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으로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임신한 상태 자살을 시도하는데 현대에서 임신출산은 여성에게는 사회진출의 장벽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임신우울증은 흔한 병이 되어 있는 현대에 더 납득가능한 설정이기도 합니다.
피노키오식 성장과 백치아다다식 무모한 이타 등 여러 단계를 거치며 사회진출과 경제활동에 눈을 뜬 벨라를 남성들은 이해하지 못하죠. 지켜보고 지지하는 맥스만이 끝까지 남게 되는 것은 아마도 여성작가들이 쓴 요즘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이상적인 남성상이 아닐까 합니다. 소유욕 강한 남성은 양으로 만들어버리고 사회주의와 레즈를 공통분모로 하는 여성끼리 상석에 앉아 오후의 햇빛을 쬐는 모습은 이 영화를 기괴한 키메라들과 치 떨리는 메스질과 적나라한 성행위를 거듭 감상하며 뭔가 있겠지 끝까지 보게 한 영화 치고는 단순한 구조였다는 허탈함을 느끼게 합니다. 역시나 엠마 스톤의 주연상과 나머지는 미술, 의상, 분장 등 말고 이야기에 의한 오스카 수상이 없었다는 것이 제 생각과 일치합니다.
빅토리아와 벨라의 뫼비우스 띠 같은 성장/퇴행은 인간의 윤회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태어났기에 기억은 없고 아기이면서도 성인의 몸을 가졌다는 모순적인 설정이고 자주 어안렌즈로 표현된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관객은 만화경으로 현실에 없는 것을 쳐다보는 것처럼 이것은 허구라는 자각을 하면서 보게 합니다. 관객이 전지적 시점에서 내려다보는 느낌, 즉 유희를 극대화시킨 탐미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각적 고통, 말초적 재미, 성적 힘의 논리의 반전 등이 과히 깊은 뜻은 없었습니다.
출연하는 여성을 중심으로 떠도는 위성같이 주변인물로만 머물고 여성들은 멘토나 동료로 자리매김됩니다. 똑똑한 여자들은 사회주의/레즈비언이고 멍청한 여자는 물 뜨는 역할에 머물고 맙니다.
미장쎈을 보는 눈호강과 포르노에 가까운 노출 및 정사씬이 난무함에도 예술영화 본다는 떳떳함을 가질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나 원작 작가와 감독 모두 남성입니다. 페미니즘을 남성적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될까요? 아니면 원작작가의 가여운 것들이라는 제목처럼 남성우월적관점에서 작가가 기사도를 발휘해 폭력적인 남편을 수술해 버리는 결말을 상정했을까요. 영화 속에서 상징하는 여러 부분들이 그저 그렇고 대단하지 못합니다. 페미니즘을 표방하기엔 단순하고 극단적이며 유치합니다. 그렇다고 다수가 즐길 영화도 못됩니다.
남성관객에게는 볼거리를 여성관객에게는 승리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의미로든 괜찮은 눈요기감이면서 관객의 허위의식을 감별하려는 것인지 감독이 그 정도인지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영화의 높은 평점은 의상과 미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봤습니다.
상황과 걸맞지 않는 의상과 식기와 가구들이 어쩌면 화면 주변의 어둠과 다르지 않은 '미화'를 위한 장식이라면 시각적 가치마저도 없는 그로테스크한 화면으로 점철될 것이 뻔한 것이므로 엠마 스톤의 오스카 수상에 빛나는 열연 말고는 '이야기'에 점수를 줄 게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여성, 사랑과 소유욕, 여성의 매춘(역사 깊은 직업) 등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를 주는 영화이기에 좋게 보자면, '고급적'인 세미ㅍㄹㄴ 아닌가 싶습니다. 줄리아 로버츠의 '귀여운 여인'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의 직업이 현실적으로는 암울한 것과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잘 봤고 즐겼지만 이 영화를 오스카 4관왕이라고 마냥 찬사를 주어야 할까라는 고민을 했더니 긴 혹평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시간을 할애해서 후기를 쓸 정도의 영화라는 것과 그랬군요는 '까'는 글을 되도록이면 자제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으셨길 바랍니다.
요약하자면, 관음과 예술을 병치해 희석하고 자극적인 소재로 성장과 페미요소를 섞었지만 대단할 것은 없는, 보긴 봐야 되는 영화인데 추천하긴 어려운, 후기마저도 키메라처럼 쓰게 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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