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포르투갈 말을 모릅니다. 포르투갈어를 들은 날, 마치 노랫소리처럼 귀에서 떠나지 않는 느낌이었고 서점에서 전혀 모르는 포르투갈어로 된 책을 집어 들게 되고 그의 인생이 바뀌는 절대적인 순간을 경험합니다.
다음은 쥔장이 읽어준 AMADEU INÁCIO DE ALMEIDA PRADO, UM OURIVES DAS PALAVRAS, LISBOA 1975.책의 내용입니다. 책의 소개말이라는데 흡인력이 느껴집니다. 다음엔 단문으로 재차 충격을 던져줍니다. 책 속의 그레고리우스에게 책 속의 문장을 읽는 수많은 그랬군요들에게.
And then he heard sentences that stunned him, for they sounded as if they had been written for him alone, and not only for him, but for him on this morning that had changed everything.
그리고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마치 자신만을 위해 씌여졌고, 게다가 모든 것이 바뀐 오늘 아침의 그를 위해 쓰인 것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Of the thousand experiences we have, we find language for one at most and even this one merely by chance and without the care it deserves. Buried under all the mute experiences are those unseen ones that give our life its form, its color, and its melody. Then, when we turn to these treasures, as archaeologists of the soul, we discover how confusing they are. The object of contemplation refuses to stand still, the words bounce off the experience and in the end, pure contradictions stand on the paper. For a long time, I thought it was a defect, something to be overcome. Today I think it is different: that recognition of the confusion is the ideal path to understanding these intimate yet enigmatic experiences. That sounds strange, even bizarre, I know. But ever since I have seen the issue in this light, I have the feeling of being really awake and alive for the first time.
우리가 경험하는 수천 가지의 경험 중 언어를 발견하는 것은 기껏해야 한 가지에 불과하며, 이마저도 우연에 의해, 그것도 제대로 된 배려 없이 이루어집니다. 모든 침묵의 경험 아래에는 우리 삶에 형태와 색채, 멜로디를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경험들이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고고학자로서 이 보물들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것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묵상의 대상은 가만히 있기를 거부하고, 단어는 경험에서 튀어나오고, 결국에는 순수한 모순이 종이에 서 있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그것이 극복해야 할 결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혼란을 인정하는 것이 이 친밀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을 이해하는 이상적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하고 기괴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 이후로 저는 처음으로 정말 깨어 있고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략)
Given that we can live only a small part of what there is in us—what happens with the rest?
세상의 극히 일부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될까요?
포르투행 급행열차를 탔습니다. 제목에 충실하기 위해 이틀 뒤에 탔던 리스본행 주간열차까지 사진을 모아서 올립니다.
포르투행 급행열차가 9시경이었기 때문에 해가 막 떠오른 8시부터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유난히도 일출의 황금빛이 아름답습니다.
일출이나 일몰을 정자세로 직관할 때 장엄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알면서도 그 '정자세'와 '제 때'를 맞추기도 어렵고 우리는(이럴 때 우리라고 쓰는 겁니다) 똑 같은 해가 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라도 날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아름다움이 목아지를 잡아당기는 견인력을 제대로 느끼는 것은 그 '제 때'에 하필 마음이 담긴 몸을 흔들어 움직이고 있을 때입니다. 고개가 태양 방향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을 제어하기 쉽지 않습니다. 길에서 우연히 지나치는 Head turner를 무시하기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틀 뒤에 다시 올 리스본의 그날 아침 일출은 리스본에서 본 마지막 일출이기도 합니다. 이후에는 '제 때'라는 것과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아폴로니아 역입니다. 빔 벤더스 감독의 리스본 스토리 영화 속에서도 거친 톤으로 나오는데 지붕 모양 보고 한 번에 알아봤습니다.
플램폼 사진은 전진, 희망, 이별 등 감정과 결심이 깃든 단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라피티에 진심인 포르투기즈, 워싱턴주에서 기차에 낙서한 것을 많이 봤지만 포르투갈 그라피티는 형식을 갖추는 느낌, 제도권에 살짝 발을 걸친 느낌이 듭니다.
기차가 출발할 때 봤던 아파트 외벽 그림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게 환상적이었습니다. 고색창연한 인물 아래에 장난스런 레터링이 부조화의 조화를 이룹니다.
금방 도시권을 벗어나 포도밭이 펼쳐집니다.
졸다 깼더니 쿠임브라역입니다.
아담한 집들이 있는가 하면
다 무너진 폐허, 대책 없이 가장 느린 철거를 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캄파냐 역에서 상 벤투까지 가는 기차로 갈아타야 합니다.
출도착 현황판을 읽어보니 영어와 포르투갈 말이 서울말과 제주말씨 정도의 관계 같아 보입니다.
역사 안에 과일상이라니 80년대 한국 모습이 이랬던 것 같은데요. 선물꾸러미 형태가 많은 것을 보니 포르투갈 사람들의 일상이 우리네와 별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정오를 갓 지나 해가 정남향이지만 기울기가 저거 밖에 안 되는 겨울에 이리 맑은 날이라니 축복받은 기분입니다.
4분 거리의 상 벤투행 열차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아 사진놀이하며 소일했습니다.
포르투행 열차를 타고 상 벤투에 도착한 뒷이야기는 다음으로 넘기고 이틀 뒤의 리스본행 열차를 타보겠습니다.^^
이틀 후 점심 무렵 상 벤투에서 캄파냐 역까지 가는 지하철을 탔습니다. 입석에 서서 바깥에 보이는 요구르트 가게가 이쁩니다. 핸드폰 보고 있는 저 사람은 저 그림이 아름답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갔을 겁니다.
상 벤투에서 캄파냐 역 사이에 기차 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포르투에서 헬기 관광 정도 해야 볼 수 있는 멋진 광경이 3-5초 정도에 지나갑니다. 오며 가며 모두 봤지만 사진에는 담지 못했습니다.
기차가 지나가는 궤적을 보면 두오루 강가를 따라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차를 탈 기회가 있다면 창 밖으로 시선고정, 잊지 마세요^^
1980년대 이후에 방치됐다는 Ruinas da Central Termoelétrica do Freixo입니다.
위 지도링크 첫 리뷰에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만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지나치는 풍경들 중 하나일 뿐이죠.
이제 도시를 벗어납니다.
리스본까지 20분 정도 남았습니다.
아폴로니아역에 도착했습니다. 이상 리스본행 주간열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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