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 느끼기

당신의 성과는 무엇입니까

by 그랬군요 2024. 1. 16.

주말 오후에 영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을 봤습니다. 설산의 아름다움을 실컷 볼 수 있고 동시에 죽음의 공포 끝 절망에서조차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를 상상할 수 있으며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인간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는 잣대가 모호해지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땅의 크기는 단지 자신이 누울 만한 자투리 땅 정도라는 톨스토이 소설도 연상됩니다. 생명 연장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합의가 인육을 먹는 것이라는 그들이 처한 상황의 인수분해 결론이 영화 전편에 깔려 있습니다.
 
거대 도시와 수천만 수억의 인구를 가진 현대 국가가 그 구성원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법적 틀은 복지가 지향해야 할 목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 명도 굶어 죽지 않아야 하고 한 명도 얼어 죽지 않아야 하며 단 한 명도 자포자기해서 자살하는 상황까지 몰리지 않게 하는 사회보호망이라는 것은
 
사실 영화 속, 공동합의 하에 동료 승객의 시신을 먹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의 목표와 같습니다. 먹지 않으면 죽으니 바로 합의 후 바로 실행이죠.
 
우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공정하지 않거나 불합리한 소소한 법률들이나 관행이 법으로 체계화되어 예방될 수 있거나 관심을 가지고 지키면 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불만을 종종 봅니다.
 
영국이나 캐나다의 의료보험 체계는 지불의무라는 측면으로는 완벽하지만, 실행 측면에서는 실효가 없는 껍데기 복지로 회자되는데요(선정적인 묘사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당장 아파 죽겠는데 예약하고 기다리면 저절로 낫는 정도라면 심각하지 않지만 의료 서비스는 심각한 경우에 더 시급하게 필요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안데스 설원에서 굶어 죽는 상황에 시신을 먹어도 된다는 하위법의 통과를 라디오방송에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합의했다면 아무도 생환하지 못했겠죠.
 
시스템이 구성원을 위한 체제구축이 우선이 아니고 시스템 자체 또는 시스템 운영자를 위한 체제구축과 유지에 올인하게 된다면 게다가 지배자 또는 지배그룹이 공동사회 운영의 의무를 방기하고 시스템 자체를 사유화한다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종종 볼 수 있는 불합리와 부조리와 불평 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원인이라고 한다 해도 크게 비약한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안이 필요한 때가 있고 대응이 필요한 때가 있는데 이번 연예인들의 성명은 그 구성원들의 느슨한 조직성을 감안할 때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근원적인 위안은 대응의 결과로 가늠되지, 떠나고 없는 배우를 화면으로 되새김한다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요.
 
제목과는 멀리 와버렸는데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의 성과는 여행을 떠나기 전과 같이 '살아있는' 상태 그대로 돌아온 것이 70여 일간의 투쟁의 성과임을 봤을 때,
 
일상 속에서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는 동일하며 '나'라는 주체가 오늘처럼 내일도 존재할 것이기에 오늘의 성과는 나 자체이고 내일의 성과는 오늘의 나를 유지했다는 것, 그 점에서 영화와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성과 위주의 사회라는 말을 교육이나 직업 현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요. 그것은 지배자나 자본가의 논리이지 생활인의 모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믿는다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성과를 강제하는 것이 오히려 개인적인 신체적 행복과 생각의 자유를 훼손하고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조금 알 것 같은데요.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은 아닌데 이 말 자체에 '성과'라는 것은 타성화된 성과입니다. 타성화된 성과에 생활을 맡기면 결국 자아를 위한 생활이 아닌 생활을 영위하게 되고 허망하고 우울하기 쉽습니다.
 
안데스 설원에서 살기 위해 나름의 질서를 구축하고 협동하는 모습은 건전한 사회의 가장 작은 모델이었습니다. 인육을 먹는 결정이, 피라미드를 세우자는 결정일 수도 있고 전쟁하자는 토론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 납득되는 건전한 모습에 위안받으며 그런 것이 지향점인 것이 예술작품으로 나오는, 아직 '온전한 사회'임을 느끼며 거듭 위안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