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라는 것은 참 묘합니다. 오늘도 싸구려 글을 써 댑니다. 왜 싸구려라 자학하냐 하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써지는 대로 쓰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날 때 그 생각이 한 여름 부라보콘처럼, 갓 내린 에스프레소의 크레마처럼 잠시 머물다가 형체를 감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라도 생각나면 기록을 하기로 했습니다. 앞 말과 뒷 말이 대화를 합니다. 그러면서 한 '자앙'을 펼치고 차지해 버립니다. 그것이 게시판 한 줄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글쓰기라는 것을 퍼즐의 완성이 아니라 퍼즐의 쏟아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일 천 피스의 퍼즐을 책상 위에 쏟아붓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제가 즉흥적으로 써낸 싸구려 글인 경우에는요. 골드러시 때 서부로 서부로 달려간 이들이 삽과 체를 들고 물가에서 모래를 퍼 헤아리듯이, 가끔은 머리에서 쏟아낸 퍼즐들이 수많은 모래알 중에 가끔 반짝이는 사금을 품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머리에 떠올랐고 그 생각을 삽으로 퍼, 글이라는 체로 걸러보면 가끔은 그 말 때문에 얻는 무엇이 있습니다. 글쓰기는 자신 생각 속의 해변을 끝도 없이 걷는 것과 같습니다. 고운 모래밭이나 불가사리나 바위나 절벽이나 소나무나 갈매기나 저 멀리 지나가는 한 척의 배나 지는 해나 뜨는 달과 수 많은 별을 만나는 그런 해변 말입니다.
독서라는 것 또한 모래 속의 사금을 찾는 행위로 볼 수도 있고 그 과정 자체가 황금같이 소중하지만 독서라는 행위가 얼마나 넓은 해변을 헤매야 하는지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글쓰기라는 '걷기'는 그나마 작업반경을 좁힐 수 있는 선택지입니다. 벡터의 쌍방향 대화이며 호흡이며 소화와 순환입니다. 읽고 쓰지 않으면 질식하거나 리셋됩니다. 오직 써야만 그 위에 다시 쌓을 수 있습니다.
커피콩을 볶아서 갈아서 담고 다져서 에스프레소를 뽑아내는 행위가 읽을거리를 고르고 읽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나는 것을 글로 주워 담고 책상에 부어 그 중에 퍼즐 조각을 찾는 것과 평행하게 맞닿습니다.
가루가 굵으면 빨리 내려지고 싱거우며 가루가 고우면 늦게 내려지고 맛이 써집니다. 탬핑을 설렁설렁하면 또한 빨리 내려옵니다. 단계별로 상대적 효과를 생각하면서 마지막 결과에 영향을 끼칠 변수를 조절하면서 커피를 뽑아내는 아침의 행사는 독서와 글쓰기로 이어지는 생각의 여행과 닮았습니다.
좋아하는 어떤 분이 소설가 최윤이 좋다고 해서 무작정 최윤을 찾았습니다. 이정현, 문성근 주연에 장선우 감독의 1996년 영화 '꽃잎'의 원작 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가 최윤 작가 작품이었습니다. 영화는 봤지만 소설은 금시초문이고 영화는 봤지만 감상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없을 정도로 희미합니다.
광주에 대한 직설을 기대하던 시절 암시와 완곡한 화법에 대한 불만이 많았었기에 영화의 표현에 대해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은 확실합니다. There a Petal Silently Falls이라는 제목으로 영문번역도 됐네요. '얼굴을 비울 때까지'라는 단편을 커피 홀짝거리며 읽기 시작했다가 해변과 사금과 글쓰기와 독서라는 단어들이 한 줄로 꿰어져서 또 이렇게 싸구려 글을 써 놓습니다. 오늘 찾은 사금이 이 글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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