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해로 남은 것들(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에서 막혀서 한 열흘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서성였습니다. 그 앞의 12편의 글도 어렵지 않은 것들이 없지만 어느 글 하나 새로운 지평을 열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쉬운 글을 읽을 때는 무의미한 단어와 문장을 따라서 초침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드는 경험을 했었는데 상대적으로 보람을 느끼며 단어 하나씩 또박또박 읽다가 가끔은 윗줄로 올라가 되읽는 이 책에서 '형해로 남은 것들'은 유독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 솔직하지 않은 표현을 다시 고쳐 말한다면, 이해를 못 해서 멈춰있는 것입니다.
독서를 할 때 이해하지 못해도 넘어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전체를 읽고 나면 반복된 주제 등으로 어느새 체화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짧은 평론, 그것도 시를 주제로 한 이런 글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다음 줄을 읽는다면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시간낭비입니다.
어떤 시를 분석하고 평을 한다는 작업은 제가 느끼기에 본래 그 시를 쓴 시인의 상황으로 임장하고 이입해서 재구성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형해로 남은 것들'에서 황현산 본인이 간격을 두고 겪었던 '애리조나 카우보이'라는 노래에 얽힌 경험과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상아탑', 랭보의 '언어연금술(지옥에서 보낸 한 철)'과 일뤼미나시옹, 백석의 '모닥불',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보들레르의 '시체(악의 꽃)'을 병렬로 풀어헤쳐놓고 벤야민의 '알레고리적 고행'의 예로 삼으면서 본질을 알리려는 작품들의 진의가 어떻게 담기고 해석되는지를, 또한 예제 삼아 오규원의 시 '칸나'를 독자에게 던집니다.
시를 많이 읽지도 않고 평론 또한 황현산님의 이 책을 붙들고만 있은 지 오래지만 읽다 보니 평론이란 어떤 자세로 써야 하는지 저절로 이해되더군요. 다만 자세는 알겠는데 이 '형해로 남은 것들'이 만만하게 책장을 넘기게 하지 않은 것이 제 외부적 상황 때문인지 인지능력 부족 때문인지조차 모르겠더군요.
지난주 어느 날 밤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직 눈꺼풀은 겨울철 마당 구석에 묻어 놓은 김장독 뚜껑 위에 놓인 돌이라도 얹힌 듯 무거운데도 억지로 실눈을 떠 눈부신 이북리더 화면을 마주 봤습니다. 잠을 청하지 않고 '형해로 남은 것들'을 읽었습니다. 아마도 어려운 문장을 읽으면 지쳐서 다시 잠들기 쉽지 않을까라는 기대 했나 봅니다.
예전에 영화 Arrival(한국명 컨택트)에 대한 황현산 님의 글에서 글 읽는 희열을 느낀 바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글의 구조도 감동도 그때와 비슷했습니다. 글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저는 다른 사람입니다. 타인의 생각, 타인의 행동, 타인의 인생을 바꿀 그런 글에 어떤 설득하려는 강조도 없습니다. 관찰하고 분석하며 연관된 이치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어찌하라고 어떻게 살라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알려주는 Nudge가 있으니 독자는 흔들립니다. 외부의 넛지에 임하는 것은 그 대상의 수동적인 동시에 적극적 행위입니다.
본질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상에서 우리는 시각에 의존합니다. 주변 사물을 보는 시각도 중요하고 사안과 사건을 통찰하는 '시각'도 중요합니다. 그런 시각은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있습니다. 주변 사물의 존재 이유가 본질로부터 이해되고 직면한 어떤 상황에서도 본질적인 문제나 목적을 파악하지 못하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은 외형으로부터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있고 자체가 복잡해서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며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외부의 설명들이 오히려 갈피를 흩뜨려놓는 경우도 있겠죠. 단순화시켰을 때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 있고 훼손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형해로 남은 것들'에서 각각의 예제들은 모두 본질을 드러내는 어떤 것은 '시쓰기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괴롭힐 때'라고 말합니다. 벤야민의 표현으로는 알레고리적으로 고행한다고 했지만 저는 황현산 님의 말도 함축적이면서 최선의 설명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음 문구를 만나면서 다시 알게 됐습니다.
글쓰기는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명확성과 이해를 만들어낸다. 또는 그런 착각을 하게 한다. 자신의 언어에 운이 좋은 사람은 스스로를 향해 눈을 뜨는 것과 같아서 새로운 시간을 경험한다. 시의 현존이라는 시간이다.
- 페드루 바스쿠 드 알메이다 프라두 , '시의 시간' 1903, 리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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