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명확성과 이해를 만들어낸다. 또는 그런 착각을 하게 한다. 자신의 언어에 운이 좋은 사람은 스스로를 향해 눈을 뜨는 것과 같아서 새로운 시간을 경험한다. 시의 현존이라는 시간이다.
- 페드루 바스쿠 드 알메이다 프라두 , '시의 시간' 1903, 리스본
파스칼 메르시어를 만났습니다. 물론 책으로 만났죠. 그는 스위스의 작가이니까요.
포르투갈 여행을 앞두고 있어서 어제 여행조언을 구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리스본 풍광이 나오는 영화라고 댓글로 소개해주셨고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제레미 아이언스의 내레이션이 좋았는데요.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이미 봤었다는 것입니다. 봤는데 새롭습니다. 영화 내용은 기억이 나지만 지금 영화를 보는 시각은 이전과 달리 새롭습니다.
이는 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깨진 안경을 새로 맞추는데 안경사와 주인공은 렌즈를 바꾸며 대화를 합니다. Better? Better. Worse? Worse. 상당히 긴 분량을 잡아먹는 이 단순한 렌즈조합과정이 제가 두 번 보는 영화를 새롭게 보는 이유를 알려줍니다. 시각이 달라졌다는. 영화 속에서도 보는 눈(삶을 바라보는 생각)이 안경뿐이 아니라는 말을 대변하는 것이겠죠.
영화는 보기만 해도 무료한 일상으로 시작합니다. 엄청난 양의 서가의 책들과 티백이 떨어져 쓰레기통에서 어제 버린 티백을 꺼내 차를 마시는 장면이 가라앉다 못해 괴사하고 있는 주인공의 삶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영화제목이 스포입니다. 스위스 베른에서 포르투갈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게 되는 과정, 리스본에서 머물면서 직장에서 오는 전화를 대수롭지 않게 응대하는 모습으로 그의 심경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에 삶의 터전을 떠나는 기차를 망설이지 않고 탈 수 있었던 것이죠.
과거에 이 영화를 볼 때 화면과 화면 사이의 맥락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으며 도입부 묘령의 여인이 대한 생각만 했었네요. 영화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데 그럴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영화가 흘러가버리고 맙니다. 제가 과거에 알아채지 못하고 그랬었던 것처럼.
제레미 아이언스의 나레이션이 좋은 것은 원작의 문구가 좋기 때문입니다. 영화와 동명의 원작소설은 파스칼 메르시어가 썼고 영화 속에서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도 등장한답니다.
영화 속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아마데우의 책 속 문구에 이끌려 리스본으로 떠나는 일탈을 저질렀듯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동시에 그 문구들은 도착합니다. 열린 결말로 끝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문구로부터 받은 자극과 제레미 아이언스의 선택에 대한 궁금함은 다시 관객 스스로 속으로 향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도.
일단, 리스본행 야간열차 책을 구했고 천천히 살펴볼까 합니다. 언어의 온도라는 신작도 관심이 가는데 아직 영문판은 없고 국내번역은 있습니다. 맨 위의 인용문은 언어의 온도 한국판 미리보기를 펼쳤다가 만났습니다. 상당한 분량이라 어쩌면 영화를 기다릴지도 모르겠네요.
제레미 아이언스가 아마데우의 글을 읽고 리스본으로 향했다가 모든 의문이 풀린 후 다시 베른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망설이는 모습은 결단이자 깨달음이자 삶의 분기점이 되는 순간입니다.
영화 속 남의 삶일지라도 그런 모습이 거울처럼 느껴진다면 우리가 찾아갈 리스본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겠지요.
역사적 사건을 둘러싸고 청춘들의 사랑과 격변, 주인공의 일탈로 풀리는 당시의 의문들, 타인들의 삶 속에서 현재 나의 삶의 해답이 드러나고 그것은 탐색의 과정에 만난 사람들과의 소통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것. 이 영화는 리스본으로 떠나는 계기가 있다면 묻따 말고 올라타라는 교훈을 줍니다.
영화 강추합니다. 아마존 프라임무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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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goodreads.com/book/show/1528410.Night_Train_to_Lis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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